1.
“백미당(남양유업 외식사업부)은 우리에게 넘기기로 합의해놓고 이를 지키지 않았다”
지난해 5월 남양유업 홍원식 회장은 사모펀드 운용사 한앤컴퍼니에 지분 53%(3107억원)를 넘기기로 계약하였습니다. 그런데 7월 말 이사진 교체를 위한 임시 주주총회에 ‘노쇼’를 했습니다. 약 한달여 뒤인 9월초 한앤컴퍼니에 계약해제를 통보하면서 '선행조건 미충족'을 이유로 들었습니다. 주식매매계약을 완결짓기 위한 선행조건 가운데 하나로 백미당은 분사하여 매각에서 제외키로 했다는 겁니다. 한앤컴퍼니는 이를 약속한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본계약서에는 백미당 분사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습니다.
2.
지난 6월7일 서울중앙지법에서는 한앤컴퍼니가 제기한 주식매매계약 이행소송 6차 공판이 열렸습니다. 증인으로 출석한 함춘승 피에이치앤컴퍼니 사장은 “홍 회장이 주식양수도 계약 체결 당시 백미당을 경영할 생각이 없었으며 백미당을 원하지도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함 사장은 홍 회장측 매각자문 역할을 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이날 증인신문 직전 홍 회장 측은 한앤컴퍼니와 체결했다는 별도합의서를 재판부에 제출했습니다. 양측의 도장이나 날인 서명도 없는 이 합의서에는 “한앤컴퍼니가 남양유업을 재매각할 때 홍 회장이 우선협상권을 갖는다”는 내용이 들어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별도합의서라는 것은 일종의 이면계약서인 셈입니다. 한앤컴퍼니는 별도합의를 체결한 적이 없다는 입장이고, 함 사장도 “이 같은 합의서를 본 적이 없다”고 증언하였습니다.
이상합니다. 홍 회장측은 지난해 7월 임시주총 노쇼 이후 계속하여 백미당 문제를 거론하였지만, 남양유업 재매각시 우선협상권 이야기는 한번도 언급한 적이 없습니다. 한앤컴퍼니가 제기한 여러 차례의 가처분 소송에서도 마찬가지였죠. 한앤컴퍼니가 약속했다는 백미당은 어디로 가고 난데없이 남양유업 우선협상권이 등장했을까요?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홍 회장측이 이 별도합의서(종이문서가 아닌 사진촬영본)을 재판부에 제출하면서 “남양유업은 백미당의 오타일 수 있다”고 언급했다는 겁니다. 즉 ‘남양유업’에 대한 우선협상권이 아니라 ‘백미당’에 대한 우선협상권이라는 거죠.
이게 정말 오타라면 말이 되는 걸까요?
3,
예를 들어봅시다.
㈜서울과 ㈜경기가 ㈜제주를 인수한다고 가정합니다. 서울이 지분 70%, 경기가 지분 30%를 갖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서울과 경기는 주주간 계약을 맺습니다. 나중에 서울이 지분을 매각하려 한다면 경기가 우선매수권을 갖기로 하였습니다.
우선매수권은 두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우선거절권(Right of First Refusal)과 우선협상권(Right of First Offer)입니다. 이러한 권리들은 법률에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따라서 세부 내용은 쌍방간 합의에 따라 달라집니다.
일반적인 우선거절권은 이렇습니다. 서울은 지분을 매각하려 합니다. 제3자인 충북과 지분 70%를 10억에 양수도하기로 잠정계약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경기에게 10억에 매수할 의사가 있느냐고 타진합니다. 경기가 10억에 사겠다고 하면 지분은 경기에게 넘어가는 것이고, 경기가 거절하면 서울과 충북간 계약이 성사되는 겁니다.
우선협상권은 좀 다릅니다. 처음부터 서울은 경기와 지분 양수도 협상을 하는 겁니다. 서울은 10억에 팔고 싶은데 경기는 9억에 사고 싶어합니다. 거래가 무산되면 서울은 10억에 사 줄 매수자를 찾아나서겠죠. 충북이 됐건 충남이 됐건 10억에 사겠다는 곳이 나타나면 계약이 체결되는 겁니다.
경기 입장에서는 우선거절권이 갖고 있건, 우선협상권을 갖고 있건, 우선하여 매수할 권리를 가집니다. 다만 우선거절권의 경우 서울이 제3자와 합의한 가격을 경기가 수용할지 말지를 결정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선협상권은 제3자 없이 경기가 서울에게 매수가격을 제시하는 겁니다. 서울이 원하는 가격과 맞으면 거래가 되고, 맞지 않아 협상이 무산되면 서울은 원하는 가격을 받을 수 있는 원매자를 찾는 거죠.
4.
우선매수권은 M&A에서 매도자에게 부여할 수도 있습니다. 한앤컴퍼니가 홍 회장에게 추후 남양유업 재매각시 우선협상권을 부여하겠다는 약속을 할 수는 있습니다.
한앤컴퍼니는 남양유업의 가치를 올리는 작업을 할 것이고, 아마도 몇 년 뒤에는 매수가격보다 더 비싼 가격으로 재매각을 하려 하겠죠. 이 때 홍 회장이 우선협상권을 행사하여 양측의 매수매도 희망가격이 일치한다면 거래가 성사될 수 있을 겁니다. 이것은 남양유업이 한앤컴퍼니로 넘어가고, 이후 적어도 몇 년이 흐른 뒤 벌어질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홍회장 측 말대로 남양유업이 백미당의 오타라고 해 봅시다. 백미당에 대한 우선협상권을 홍 회장측이 요구할 필요가 있을까요?
한앤컴퍼니가 몇년 뒤 남양유업을 제3자에게 매각하려 할 때, 그 시점에 백미당은 따로 떼내어 홍 회장과 우선협상해야 한다는 이야기라면 말이 되겠죠. 그러나 홍 회장이 지금까지 주장한 것은, 남양유업을 한앤컴퍼니에 매각하는 과정에서 백미당을 따로 넘겨받기로 하였다는 것입니다.
백미당은 남양유업의 외식사업부입니다. 사내 영업부문인거죠. 따라서 홍 회장측이 남양유업을 넘기는 과정에서 백미당을 가지려면 두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남양유업에서 백미당을 물적분할하여 100% 자회사로 만듭니다. 그리고 홍 회장이 백미당 지분 100%를 사면 됩니다. 한앤컴퍼니는 백미당이 없는 남양유업을 인수하는 거죠.
아니면, 홍회장이 회사를 하나 세웁니다. 이 회사가 남양유업으로부터 백미당을 영업양수도 방식으로 인수합니다. 마찬가지로 한앤컴퍼니는 백미당이 없는 남양유업을 인수하면 되는 겁니다. 만약 양측이 별도합의서에 백미당과 관련한 내용을 포함시키기로 하였다면, 백미당을 어떻게 홍 회장이 가져갈 건인지 양수도 방법을 거론하였겠죠. 우선협상권을 언급하는 것은 이상합니다.
5.
한앤컴퍼니가 홍 회장을 상대로 여러 차례 가처분 소송을 제기하였을 때 홍 회장은 별도합의서를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상식적이라면 가처분으로 쌍방이 치열하게 다툼을 벌일 때 공개하는 것이 맞습니다. 아껴 둬야만 하는 비장의 무기가 절대 아닙니다.
갑자기 등장한 별도합의서에는 도장도 날인 서명도 없는데, '남양유업'이라는 단어는 '백미당' 오타니 어쩌니 하는 이야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과연 얼마나 믿을 수 있는 합의서일까요?
내일(6월21일) 남양유업 매각 관련 7차 공판이 열립니다. 한앤컴퍼니 한상원 대표와 홍 회장이 직접 증인으로 나설 예정입니다. 별도합의서의 진실 여부에 대해 좀 더 확실하게 가늠할 수 있는 자리가 될 전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