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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지마 암기'가 낳은 정유업계에 대한 착각

  • Korea Monitor
  • 2022-03-08 10:28
  • (글로벌모니터 김수헌 기자)
국내 정유사의 대규모 정제설비

국내 정유사의 대규모 정제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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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러시아산 원유거래에 대한 전면제재에 나서면서 국제유가가 장중 한때 130달러를 넘어섰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정유업체들이 엄청난 재고평가이익을 거둘 것이라는 분석이 나옵니다. 유가가 오름세를 보이면 늘 볼 수 있는 기사들이죠. 지난 3월7일 한 매체의 기사를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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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말로 정유업체들은 유가급등으로 막대한 재고자산평가이익을 얻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유가가 오르면 정유업체 이익이 일반적으로 늘어난다고 하죠. 그 이유는 재고평가이익 때문이 아닙니다. 유가가 아무리 올라도, 하늘끝까지 치솟아도 정유업체들은 재고평가이익을 얻지 못합니다. 회계기준에서 재고자산은 저가법으로 평가하거든요.

2.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느 전기밥솥 만드는 회사가 밥솥 10개를 재고로 가지고 있습니다. 밥솥재고 1개당 장부가격이 1만원입니다.
이 밥솥의 인기가 치솟아 품귀 현상이 나타나면서 시장 거래가격이 1만5000원으로 올랐다고 해보죠. 이 회사가 현재 보유한 밥솥 재고를 시장 거래가격 기준으로 매기면 15만원(1만5000원X10개)이 되니까 5만원의 평가이익이 발생할까요?

아닙니다. 재고자산은 이른바 '저가법' 평가를 하니까 회사 장부에 적힌 재고가격 총 10만원은 변함이 없습니다.

2.
만약 밥솥 인기가 떨어지고 판매가 너무 부진해 시장 거래가격이 8000원이 됐다면요? 이 때는 재고자산평가손실을 반영해야 합니다. 저가법을 적용하여 재고자산장부가격을 10만원(1만원X10개)에서 8만원(8000원X10개)으로 고칩니다.그리고 2만원의 평가손실을 반영합니다. 재고평가손실은 손익결산을 할 때 매출원가에다 2만원을 더해주는 식으로 처리합니다. 그만큼 이익이 줄어들겠죠.

재고는 저가법에 따라 평가이익을 반영하지 않지만 평가손실은 반영하는 게 회계기준입니다. 보수적인 회계처리죠.

3.
정유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배럴당 70달러에 수입한 원유를 저장탱크에 보관중인 상태에서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까지 올라가면 배럴당 30달러의 재고자산평가이익을 얻어서 영업이익이 증가한다는 식의 보도들을 많이 보시죠?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경우는 이른바 '래깅(Lagging) 효과'로 정제마진이 증가할 가능성이 큽니다.

원유는 도입하자마자 바로 석유류 제품생산에 투입되지 않습니다. 증류설비 투입까지는 최소 한두달 이상의 시차가 있죠.
그새 유가가 오르고 석유류 제품(휘발유 경유 등) 판매가격도 오른다고 해보죠. 이렇게 되면 투입한 원유는 한두달 전에 싸게 구매해 온 것인데, 판매시점에 석유류 제품 가격이 올라있으니 마진이 커지겠죠. 이게 바로 래깅 효과에 따른 정제마진의 상승입니다.

유가하락기에는 그 반대현상이 나타날 가능성이 높겠죠. 투입 원유는 과거 구매해 온 비싼 것인데, 제조하여 판매하는 시점의 석유류 가격이 하락해 있으면 정제마진은 떨어지는 거죠. 더구나 유가하락기에는 정제마진 하락으로 이익이 줄어드는 것 말고도 재고자산평가손실을 입을 가능성도 있겠죠.

그래서 정유업체들은 원유가격이 서서히 오르고 정제마진이 서서히 오르는 상황을 가장 좋아하는 것입니다.

4.
현재 상황은 유가가 빠른 속도로 급등중입니다. 석유류 제품의 가격은 어떨까요? 그만큼 제품 판매가격도 그만큼 빠르게 올라야 정제마진이 커집니다. 만약 경기침체로 석유류 제품 수요가 좋지 않아 판매가격 상승세가 시원찮으면 정제마진은 더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유가 상승을 판매가격 상승세가 따라잡지 못할 수도 있죠. 이 경우 정유업체들은 가동률을 낮출 수 밖에 없습니다. 원유가격이 오르면 정유업체 수익성이 좋아진다는 것은 암기해야 할 공식이 아닙니다. 재고평가이익이 난다고 착각하면 마치 공식인처럼 인식되겠죠.

유가 급등시에는 제품수요 변화, 이것이 판매가격에 미치는 영향 등을 종합적으로 잘 살펴봐야 정유업체의 수익성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래깅효과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유가가 급등하면 재고평가이익이 나서 정유업체에 좋다는 식으로 이야기 하는 것이 무조건 암기은 낳은 대표적 폐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정유업계는 정제마진 하락 가능성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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