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중앙은행의 통화정책 결정기구인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가 금리인상을 유보했다. 금융시장 전문가들 중 절반 가까이가 긴축 개시를 예상했으나, 연준은 아직 그럴 형편이 못 된다고 보았다. 대신 연내에는 행동에 나설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점을 분명하게 확인했다.
그러나 하루 뒤 영란은행(영국 중앙은행)의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앤드루 홀데인이 매우 도발적인 연설을 했다. "영국의 경우는 앞으로 금리를 인상하기보다는 통화정책을 더 완화해야 할 필요성이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영국은 미국에 곧바로 이어 금리인상을 시작할 나라로 손꼽혀 왔다. 영국과 미국의 경제 사이클이 유사하기 때문이다. 영국이 그러하다면 사정은 미국도 비슷할 수 있다. 이미 금융시장에서는 미국이 긴축은커녕 "제4차 양적완화를 해야 할 것"이라는 주장이 번지고 있다.
정작 세상을 놀라게 한 발언은 다른 대목이었다. 홀데인 이코미스트는 "현찰화폐를 없애서 마이너스 금리제도를 보편적으로 도입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밝혔다. 먼 미래의 일도 아니고, '중기적으로 검토해야 할 중요한 과제'라고 말했다. 세계 4대 준비통화(파운드)를 발행하는 기관의 조사연구 총책임자가 한 말이어서 예사롭지 않다. 그렇다면 역시 미국도 그 필요성이 절실할 수 있다.
비슷한 시기에 한국은행의 이주열 총재는 리디노미네이션(화폐단위 절하) 이슈에 대한 여당 의원의 질문에 "필요성에 대한 논의가 있고, 이에 공감한다"고 말했다.
"다음 번 경기침체 때에는 대응할 수단이 없다"
미국 FOMC는 석 달에 한번 꼴로 미래에 예상되는 정책금리 수준을 제시한다. 이번 회의에서 FOMC 위원들은 오는 2017년말 연방기금금리 목표치가 2.63%로 인상돼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이들이 제시하는 금리 예상치는 매번 쉼 없이 낮춰져 왔다. 경제환경이 기대했던 것만큼 강하게 회복되지 않고 있어서다. 그러나 이렇게 계속 낮춰져 온 정책금리조차도 금융시장 참가자들이 보기에는 여전히 허황되게 높은 수준이다. 금리 파생상품시장 가격에 반영된 오는 2017년말 정책금리 예상치는 1.22%에 불과하다.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역사를 되돌아 보면 미국의 경기 상승국면은 길어 봐야 10년이었다. 지금의 경기 확장기는 나이가 벌써 만 6년4개월이 되었다. 2017년말쯤에는 경기가 하강국면으로 돌아서 있을 확률이 상대적으로 매우 높다는 뜻이다. 만약 그 때 정말로 경기가 꺾인다면 미국 중앙은행은 금리를 얼마나 내려서 대응할 수 있을까?
FOMC 위원들의 전망대로라면 인하 여력은 2.5%포인트 수준이다. 금리파생시장의 예상대로라면 대응 버퍼가 1%포인트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정책금리는 이론상 0% 한참 밑으로는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영란은행 분석에 따르면, 과거 침체국면에서 중앙은행들은 금리를 대략 3~5%포인트 가량 인하해 경기를 떠받쳤었다. 지금 예상하고 있는 완충능력(1~2.5%포인트)으로는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경기침체가 더 빨리 오게 된다면 대응여력도 더 부족해진다.
과거에는 이런 문제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금리가 지금에 비해 항상 제법 높은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융위기 이후로는 그런 고금리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지금 미국과 영국, 유로존, 일본, 스위스, 스웨덴 등 수많은 선진국들의 정책금리는 0% 수준이다.
현찰은 '원금을 보장'해 주는 유가증권
금리를 0% 밑으로 인하하지 못하는, 그래서 중앙은행의 경기침체 대응을 어렵게 하는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현찰화폐'라는 존재 때문이다. 현찰화폐는 0%의 확정금리를 제공하는 유가증권이다. 과거에는 0%의 금리가 일종의 불이익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급적 현찰보유를 줄이고 예금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선진국 단기국채의 상당수가 이미 약간의 마이너스로 떨어져 있다. 중앙은행이 만약 정책금리를 마이너스 한참 밑으로 더 인하한다면 대부분의 은행예금 이자율까지 마이너스가 될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은행에 돈을 넣어두기보다는 원금을 보장해 주는 현찰화폐를 보유하려고 할 것이다. 은행에는 돈이 남아있지 않을 것이고 금융중개기능이 사라지면서 경제는 엉망이 되고 만다. 그래서 '0%(또는 미약한 수준의 마이너스)'는 현 제도 하에서 중앙은행이 내릴 수 있는 금리의 하한(zero lower bound)으로 여겨지고 있다.
금융위기 이후 더 이상 금리를 내릴 수 없게 된 선진국 중앙은행들은 양적완화라는 비전통적인 통화정책 수단을 사용했다. 중장기 국채를 직접 사들여 마치 금리를 마이너스로 인하한 것과 유사한 효과를 냈다. 그러나 이 정책에는 만만치 않은 부작용이 수반된다. 자산가격 거품이 대표적인 현상 중 하나다. 이미 자산가격이 대폭 올라 있어 더 띄울 여지가 제한적이다. 중앙은행이 사들일 수 있는 국채의 양이 한정돼 있다는 점은 근본적인 한계로 작용한다.
더 큰 문제는 지금과 같은 초저금리가 장기 구조적인 현상이라는데 있다. 그렇다면 중앙은행들은 '제로금리 하한'에 반복해서 봉착하게 될 것이다. 시장금리의 하락추세는 이미 금융위기 이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영란은행 분석에 따르면, 지난 1980년대 이후 금리 하락폭의 4할 가량은 잠재성장률의 저하와 노령화에서 비롯됐다. 나머지 6할 가량은 기계류 가격 하락 등에 따른 자본재 투자비용 감소와 빈부격차 심화 탓에 발생했다. 그러니 경기가 좀 나아진다고 해서 시장금리가 과거처럼 충분히 넉넉하게 높아질 걸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중앙은행들은 제로금리 하한의 구조적인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뭔가 다른 창의적인 정책수단을 미리 개발해 두어야 한다. 영란은행의 앤드루 홀데인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그 대안으로 현찰화폐 폐지와 마이너스 금리 도입이 가장 유력하다고 보았다. 모든 돈을 전자화폐로 바꾸면 마이너스 한참 밑으로 정책금리를 내려도 돈이 은행을 빠져나가는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주장대로 머지 않은 시기에 마이너스 금리제도가 가능해지면 은행에 돈을 빌려주는(예금) 대가로 이자를 지불해야 하는 인류역사상 초유의 일이 경기 침체기 때마다 반복될 것이다. 현찰화폐가 사라졌기 때문에 현금 유동성을 온전하게 보관할 다른 대안은 존재하지 않는다.
일부 선진국들에서나 나타나는 특이 현상으로 치부하기 어렵다. 마이너스 금리가 되면 상대적으로 이자율이 높은 나라로 선진국 자금이 대거 이동할 수 있다. 그러면 해당국가의 통화가치는 급등하게 된다. 물가가 추락하고 수출이 어려워진다. 금리를 따라서 내리는 수밖에 없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선진국과의 금리차가 대폭 좁혀진 곳들은 마이너스 금리를 함께 운영해야 할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정책금리는 1.5%이다. 미국과는 1.25~1.5%포인트, 영국과는 1%포인트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만약 미국이나 영국이 정책금리를 마이너스 2% 밑으로 내리게 된다면 우리의 정책금리 역시 마이너스로 떨어져야 할 필요성이 커진다.
한국의 '리디노미네이션'과 화폐개혁
최근 우리나라에서 다시 고개를 든 리디노미네이션 역시 화폐제도를 근본적으로 수술하는 정책이다. 화폐단위를 1000분의 1로 줄여 1000원을 1환으로 바꾸는 식이다. 각종 회계와 통계 편의성이 높아지고 대외 체면이 개선되며, 바닥에 떨어진 물가를 회복시키는 이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거액의 여유자금을 보유한 사람들에게는 매우 불편한 현실이 될 수도 있다. 주목할 점은 5만원권 고액지폐가 시중에 대량으로 풀려 나가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7월말 현재 한국은행이 공급한 돈(본원통화) 가운데 현찰로 유통되는 화폐의 비중이 61.4%에 달했다. 관련 통계를 작성한 이후로 가장 높은 수치다.
전자상거래의 발달과 상품권 등 유사화폐의 확산으로 현찰의 비중은 한동안 빠른 속도로 낮아졌다. 지난 2009년초에는 32.5%로까지 떨어졌다. 그러나 이후로 현찰 비중이 가파르게 높아지기를 거듭해 오늘날 두 배가 되었다. 보관, 운송하기가 훨씬 용이해진 5만원권이 공급된 뒤부터다. 시장금리가 대폭 떨어져 현찰 보유에 따르는 기회손실이 최소화된 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 고액 현찰의 상당부분은 불법거래 또는 세금회피를 위해 인출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실체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정부는 부정적인 입장이지만, 만약 리디노미네이션이 이뤄지게 된다면, 현재 70조원을 넘어선 현찰 유통화폐는 '헌 돈(舊券)'으로 전락하게 된다. 일정 기간 안에 전액 '새 돈'으로 교환되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정부가 고액 신권 교환을 제한한다면 이 현찰들 중 상당액은 은행에 예금되고 신분을 노출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리디노미네이션은 화폐개혁으로 진화하게 된다. 지하 음성 거래가 크게 위축되고 상당한 규모의 세원(稅源)이 노출될 수 있다. 선진국에서 활기를 더해가고 있는 "현찰 폐지" 논의도 이러한 점을 '부가소득'으로 명백히 겨냥하고 있다.
☞ 관련기사 : 은행과 돈의 미래
☞ 관련기사 : 지하경제 양성화를 위한 고액권 규제
☞ 관련기사 : 그 많은 돈은 다 어디로 갔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