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obal Monitor

시험대에 오른 "무엇이든 하겠다"

  • Market Focus
  • 2015-02-09 09:33
  • (글로벌모니터 안근모 기자)
# 1992년 9월5일

영국 배스에서 열린 유럽 재무장관회의. 격분한 헬무트 슐레징거 분데스방크(독일 중앙은행) 총재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회의 의장이기도 한 노먼 라몬트 영국 재무장관이 독일의 금리인하를 거듭해서, 급기야 네번째로 요구하는 발언을 쏟아낸 직후였다.

독일 마르크화에 환율을 고정시켜 놓았던 당시 영국 파운드화는 강한 평가절하 압력을 받고 있었다. 인플레이션이 이미 독일보다 훨씬 높은 상황인데도 영국 영란은행이 미국을 따라 금리까지 내려버렸기 때문이다. 독일이 금리를 함께 인하하면 고평가돼 있던 파운드는 시장의 압력을 피할 수도 있을 거란 게 영국의 생각이었다. 영국의 라몬트 장관은 독일의 슐레징거 총재에게 심지어 '당신이 가서 개인적으로 금리를 내려버리면 되지 않느냐'고까지 말했다.

그러나 슐레징거 총재는 완고했다. 그런 약속을 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며 거듭 거부했다. 동석해 있던 독일 재무장관이 뜯어 말린 덕에 가까스로 두 사람의 파열은 봉합됐다. 결국 회의 뒤 성명서는 "현 상황에서 독일은 더 이상 금리를 인상할 계획이 없다"는 문구를 담는데 그쳤다.

당시 분데스방크의 입장은 명확했다. 독일의 금리인하가 아닌, 파운드화의 공식적인 평가절하만이 해법이라고 믿고 있었다. 사정은 이탈리아 리라화도 마찬가지였다.

# 그리고 엿새 뒤인 9월11일

슐레징거 총재는 이탈리아 중앙은행 총재에게 전화를 걸어 "더 이상 외환시장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투기세력과 팽팽하게 맞잡고 있던 끈을 놓아 버리자 이탈리아 리라화가 뒤로 나자빠졌다. 분데스방크가 그 직전까지 이탈리아를 위해 방출한 돈은 240억 마르크였다.

닷새 뒤인 16일, 끈 떨어진 신세의 영국 파운드도 무릎을 꿇고 말았다. 파운드는 리라와 함께 ERM(유럽환율메카니즘) 고정환율제에서 잠정 퇴출됐다.

그 직전까지만 해도 유럽은 분데스방크의 무제한 마르크화 매도개입을 당연시 하고 있었다. 고질적으로 고평가된 통화들이 공격을 받으면 독일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방어해 줄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의 '무엇이든 하겠다(do whatever it takes)'는 1992년 사태를 계기로 대전환을 맞았다. 비밀리에 존재하던 '에밍거 서한(Emminger Letter)'이 14년만에 처음으로 작동한 것이다. ☞ 관련기사 : 독일 정부 vs 독일 중앙은행 vs 이탈리아

지난 1978년, ERM 창설을 위해 분주하던 독일의 헬무트 슈미트 총리는 분데스방크의 협조를 얻어내기 위해 "통화공급 정책 등 독일 국내의 목표에 반한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외환시장 개입을 중단할 수 있다"는 예외조항을 오트마르 에밍거 총재와 정책위원들에게 밀약했다.

슈미트 총리는 "독일의 속임수를 이탈리아 언론이 보도하면 무슨 일이 생기겠느냐"며 문서로 확약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비공개 속기록에는 그의 약속이 분명히 수록됐다.

당시 슈미트 총리는 만약 미래에 독일이 손을 뺄 때에는 지난 2000년간 인류에게 전해 내려온 수려한 법언(法諺)을 들이밀겠다고 말했다.

"ultra posse nemo obligatur(No one is obligated to do more than they can do) 그 누구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이상을 행할 의무는 없다."

그리고 나서 슈미트 총리는 '확약'을 요구한 에밍거 서한에다가 'R'이라는 암호같은 주석을 써 주었다. 독일어로 'richtig' 영어로는 'right'라는 의미였다.

# 1993년 7월30일

이듬해인 1993년. 새로 집권한 프랑스 보수당 정부는 실업퇴치를 위해 금리를 인하했다. 당시 프랑스의 물가는 낮게 안정돼 있었으며, 따라서 프랑스는 독일보다 낮은 수준으로 금리를 내리고도 마르크화 대비 프랑화의 강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프랑스의 자신감이 넘쳐나게 됐다. '이제는 프랑이 도이치 마르크를 대체할 수 있게 됐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의 지위가 위협받자 독일의 경계감이 고조됐다. 이런 터에 프랑스 재무장관은 '독일과 함께 금리를 추가로 동반 인하할 것'이라고까지 앞서 나갔다. 독일 정부와 분데스방크가 발끈했다. 프랑스와 금융시장의 기대와 달리 독일은 금리를 동결하고 말았다.

동반 금리인하가 무산되자 프랑화로 쓰나미같은 공격이 가해졌다. 분데스방크가 다시 프랑화 구출에 나섰다. 600억 마르크를 쏟아 부었다. 그 중 절반인 300억 마르크가 7월30일 하루만에 방출됐다. 분데스방크의 인내심이 다시 한계에 봉착했다.

결국 ERM는 '사실상의 변동환율제'로 바뀌고 말았다. 2.25%로 정해놨던 환율 변동폭을 15%로 대폭 늘렸다. 아래 위로 30%나 움직일 수 있다는 얘기였다. 대부분의 통화가 마르크에 대해 대대적으로 평가절하됐다.

# 2012년 7월 27일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가 "유로를 수호하기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고 선언한 바로 다음날, 분데스방크는 홈페이지에 묘한 인터뷰 기사를 올렸다. 옌스 바이드만 총재와 또 한 사람의 전임 총재간의 대화를 정리한 내용이었다. 그 전임총재는 바로 헬무트 슐레징거, 20년전 이탈리아 리라와 영국 파운드를 날려버렸던 장본인이다.

바이드만과 슐레징거 두 총재는 거듭해서 '재정주권의 이양 없이 행해지는 통화동맹의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했다. 고정된 환율, 같은 화폐를 사용하려면 재정정책도 같아져야 하는데 각국이 독립적으로 주권을 방만하게 행사해 불균형이 해소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재정동맹, 정치동맹을 전제로 한 통화동맹은 지난 1963년 이후 독일의 일관된 주장이었다. 그러지 않고는, 건전한 정책을 수행하는 독일은 항상 이웃국가들을 위해 무제한으로 마르크화를 방출해야만 하는 처지가 된다는 것이었다. 이 문제는 "최근 유로존 위기를 통해 더욱 더 극적으로 드러나고 있다"고 당시 바이드만 총재는 지적했다.

인터뷰에서 슐레징거 총재는 "(ERM 창설당시) 우리는 각국간의 간격이 얼마나 큰 지를 간과했었다"고 후회했다.

하지만 바이드만 총재는 "ECB에서 독일은 단지 한 표에 불과한게 아니다. 분데스방크는 유로시스템에서 가장 중요한 중앙은행이며, 다른 중앙은행들보다 더 강한 발언권을 갖는다"고 말했다. 당시 드라기 ECB 총재는 '독일도 한 표에 불과하다'는 발언에 대응한 것이었다. 두고 보자는 뜻이었다.

# 2013년 3월21일

ECB 정책위원회가 키프로스에게 최후통첩을 했다. "다음주 월요일까지" 구제금융 프로그램 협약을 맺지 않는다면 키프로스 은행들에 대한 긴급유동성지원(ELA)을 끊겠다고 밝혔다. 구제금융과 국가부도(유로존 퇴출)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요구였다.

ECB의 통첩은 명백한 법적 근거를 갖고 있었다. ELA는 결코 무제한이 아니라는 점을 ECB의 관련 규정은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유로시스템의 목표와 임무를 저해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경우 ELA를 차단할 수 있다."

이 조항은 "외환시장 개입에서 발을 뺄 수도 있다"고 한 '에밍거 서한'의 원칙을 그대로 적용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원칙은 지금 그리스에게도 적용되고 있다. 일단은 ECB 본부대출을 차단해 그리스 스스로의 책임 하에서만 그리스 은행에 유동성을 지원토록 했다. 다음 차례로는, 키프로스에게 적용했듯이, ELA 차단 카드가 남아 있다. ECB는 오는 18일 그리스 ELA의 적절성 여부를 재검토할 예정이다.

# 현재, 2015년 2월

바이드만 총재는 지난주 그리스를 겨냥해 "회원국들은 자신들의 독립적인 재정정책 결정 결과에 대해 모두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다. 구제금융 프로그램을 통한 일시적인 재정정책 주권 양여를 거부한다면 ECB는 유동성 지원을 거부하겠다는 통첩이다.

그러나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는 8일 의회연설에서 "그리스는 유럽에 대해 긴축의 의무가 없다"고 맞받았다. 그리스의 주장은 독일의 그것을 모사하고 있다. 독일이 그리스에게 무제한으로 지원할 의무가 없듯이, 그리스 역시도 독일에게 주권을 무제한으로 양여할 의무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지난 1978년 독일 슈미트 총리가 챙겨 두었던 바로 그 20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아름다운 법언이 지금은 그리스 정부의 카드이기도 하다.

"ultra posse nemo obligatur(No one is obligated to do more than they can do) 그 누구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이상을 행할 의무는 없다."

그렇다면 마리오 드라기 총재는 과연 이런 상황에서 '유로화 수호를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을까.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OMT도 사실은 '긴축개혁 구제금융 프로그램 가입'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대상국의 재정주권 양여 없이는 가동이 불가능한 제한된 방화벽이었다.

*1992년 이탈리아가 나락으로 떨어지던 당시 마리오 드라기는 이탈리아 재무부의 국장으로서 '사태'의 당사자 입장에 서 있었다.

바이드만 총재는 차제에 '재정동맹'과 '정치동맹'을 다시 한 번 밀어 붙일 기세다. 분데스방크의 그 오래된 숙원을 이루려면, 어쩌면 위기는 더 확산되어야만 할 지도 모른다. 그 위기를 기회로 헌법에 대못을 박아놓지 않는다면 지난 수십년 간의 호구 노릇을 앞으로도 계속 반복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지 모른다.

# 2015년 2월18일

그리스 ELA에 대한 적절성 여부는 기술적으로 '그리스 은행들의 상환능력(solvency)'을 따지는 데 집중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말 현재 그리스 은행들은 121.6억 유로의 그리스 국채를 보유하고 있다. 자기자본의 16.5%에 해당하는 규모다. 대손충당금을 제외한 자본의 35.4%에 달한다. 만약 그리스 국채의 가치가 불투명하다고 여겨진다면 그리스 은행들은 일거에 상환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그리스 정부는 ECB 정책위원회 이틀 전인 16일까지 구제금융 프로그램 연장을 신청해야 한다. 그리스 정부가 제안할 새로운 프로그램으로 5월말까지 협상을 하더라도, 그 기간동안에는 기존 프로그램을 유지해야 한다는 게 유럽연합의 입장이다. 그래야만 그리스 국채가 가치있는 자산으로 계속 인정될 수 있다는 게 ECB의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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